발해의 옛터, 항일무장독립운동의 기지 연해주

1863년 시작된 한인 이주,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까지 계속

최영재 기자|2014/08/13 07:11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역/사진=최영재 기자
국제한민족재단과 아시아투데이의 유라시아 시베리아 횡단 대장정 기행단(이하 기행단)은 10일 저녁 10시께 시베리아 횡단철도 편으로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했다.

지난 7일 저녁 9시 20분(현지시각) 이르쿠츠크역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동진하기 시작한 기행단은 8~10일까지 꼬박 나흘 밤낮 동안 3674km를 달려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했다. 열차는 6시간 이상 연착했다. 그러나 안내역 설명으로는 총연장 9000km가 넘는 시베리아횡단철도에서 이 정도 연착은 예사라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런 연착에도 ‘이따 라시아(이것이 러시아다)’라며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트크 일대는 연해주로 불리는 곳으로 고조선에서 고구려·발해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긴밀하게 함께 하고 있다.
나흘 밤낮을 좁은 기차 객차 안에서 지새운 기행단은 우수리스크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날 11일 오전부터 전세버스편으로 연해주 일대 탐방을 시작했다.

연해주는 조선 후기인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하면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본격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고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촌락도 생겼다. 특히 신한촌은 당시 규모가 가장 큰 한인 주거지로 1910년대 항일의 구심이 됐다.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역 자료.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기념관의 전시시설을 촬영했다/사진=최영재 기자
◇한인 연해주 이주사

제1기(1863년~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의 우호적 태도에 힘입어 한인의 이주가 계속된다.

제2기(1884년~1893년)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된 시기다. 한인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자 러시아의 제한정책이 시작된다.

제3기(1893년~1910년)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전후 독립운동을 위해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크게 늘어났다.

제4기(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주 초기의 한인 마을들

지신허는 이주 후 처음 만들어진 한인 마을이었다. 대표적인 이주 지역은 바닷가에 위치한 포시에트 촌이었다. 정착한 한인들은 이곳을 ‘목허우’라고 불렀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지신허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연추(얀치혜)와 더불어 대규모 마을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자취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기념비석이 쓸쓸히 당시 역사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마을인 개척리. 한인들은 꿈과 희망을 모아 이곳을 일구었다. 그러나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정부는 시 외곽으로 이들을 강제 이주시킨다.

새로 만들어진 신개척리라고 불렀는데 한인들은 ‘신한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한인촌’이라는 뜻의 신한촌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존재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다.

◇연해주 한인촌의 몰락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볼셰비키는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소비에트 연방을 제국화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1925년에 새롭게 형성된 국제 관계와 소비에트 정책으로 소련의 소수민족, 특히 한인에 대한 정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연해주를 무대로 전개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따라 1925년부터 한인들의 항일무장조직이 전면 금지되고 민족운동과 관련된 모든 활동이 통제와 제약을 받게 됐다.

이후 연해주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이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연해주 땅에 세워진 독립운동의 기지였던 한인사회는 붕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