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한인들의 교육과 언론을 통한 구국 운동
한인신문 <대동공보>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 안중근 의사 대동공보 통신원
최영재 기자|2014/08/13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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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직들은 지방회를 조직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원을 키웠으며 신문을 발행해 교육계몽에 앞장섰다.
이들이 운영한 학교 중 ‘한민학교’가 시설과 규모가 켰고, 근대 학문과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항일 애국운동의 구심이 됐다.
연해주에는 민족과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인 언론들이 다수 있었다. 그 첫 장을 연 신문은 구한말의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다.
1908년 2월 26일 창간된 해조신문은 연해주 최초의 한인 신문으로 재러 한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전달돼 민족 의식을 높이고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11월 18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대동공보는 친러시아적 입장에서 민족계몽과 항일 정신 고취에 힘썼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모의가 이뤄진 곳이 바로 대동공보의 사무실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 신문의 통신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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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17년 7월 5일 우스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청구신보(靑邱新報)는 귀화한 한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매주 발행됐다.
이어 한인신보(韓人新報)는 신한촌 민회의 기관지로 1917년 7월 8일 창간, 매주 1회 한글로 발행됐다. 이 신문은 재러 한인의 계몽과 간도 및 러시아 한인 사회의 동향을 자세히 기록해 역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동아공산, 붉은 기, 선봉, 연해주어부 등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도 등장했다.
그 중 1923년에 창간된 선봉은 구소련의 몰락 후 고려일보라는 제호로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다. 선봉은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으로 창간 무렵에는 ‘3월 1일’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발행되다가 4호부터 선봉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이 신문은 1937년 강제 이주 직전까지 매주 1~2회씩 발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