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 36.5℃] ‘해외에서 더 빛난다’ 이석태 “하이패션 한길“

박영주 기자|2015/08/03 06:00
이석태 패션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한길’에 큰 자부심을 피력했다. /사진=송의주 기자songuijoo@
승승장구하던 한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패기 있게 국내 들어왔을 때가 1997년,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그 해 자기 이름을 단 브랜드를 론칭했고, 이듬해 갤러리아백화점 본점에 숍도 냈다. 5년만의 폐업. 이후 ‘현장’을, 경영을 배웠고 절치부심, 2004년 재기에 성공한다. 2009년 해외 바이어의 잇단 구애로 이른바 ‘해외에서 먹히는’ 스스로를 확인했고, 이후 컬렉션과 해외 비즈니스에 주력하고 있다. 후학 양성이 꿈이다. 하이패션(High Fashion)의 한 길을 걸어온 입장에서 ‘디자이너 매니지먼트’를 통해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압축해 전달하고 싶단다. 브랜드 'KAAL E.SUKTAE’로 패션계 획을 긋고 있는 이석태 패션 디자이너 얘기다.

“디자이너 한길, 그걸 지키고 싶었다”

먼저 양해를 구했다. 패션 전문기자가 아니다보니 ‘사람’ 이석태와 에피소드 중심의 소개가 불가피하다고 고백했다. 날카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면서 “좋다”고 그가 말했다. 맘 턱 놓여 준비해온 첫 질문을 던졌다. 나름 야심찼는데, “어렵다”면서도 그의 대답은 진지했다.

‘이석태가 말하는 이석태’. 그의 디자인 세계는 논문(‘미학적 개념으로 본 이석태 디자인 분석-2011년 S/S~2013년 S/S 컬렉션을 중심으로’. 이민선 상명대학교 의류학과 교수, 2014년 6월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 제 14권 2호 게재)으로까지 소개됐다. 컬렉션 단골이며, 해외 초청도 다반사다. 그만큼 유명하다는 얘기다.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 점이 궁금했다.

“예전엔 잘 몰랐습니다. 5년만에 폐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각을 좀 많이 했어요. 돌아보면서 지금도 느끼는 건 한 방향으로 잘 간다는 겁니다.”

사업은 잘 되는데, 창의적인 디자이너를 못하거나 아님 그 반대의 경우가 많고 그는 이를 ‘불균형’이라고 설명했다.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위험한 줄다리기, 그만큼 힘든 게 패션 업계인데, “여러가지 겪고 고민하면서 그래도 지금껏 한 방향으로 왔다고 할 수 있는 게 이석태”라는 게 그의 자평이다.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는 동안 패션 패러다임도 많이 바뀌었다. 부모님들, 주변 지인들의 기대도 컸다.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이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주변 욕구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하이패션 한길을 걸어 온 데 대해 “나중에라도 가진 거 많이 없더라도 디자이너 한 길을 갔다 이 한가지만큼은 지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제가 하는 게 하이패션입니다. 저가를 하게되면 돈은 많이 벌어요. 쉽게 디자인 해서 동대문시장이나 인터넷 쇼핑몰에 판매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안합니다. 처음 생각했던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가야겠다, 지금까지는 그래왔어요.”

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한 우물을 팔 것”을 주문한다고 한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게 녹록한 건, 물론 아니다. 결국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패션쇼를 한 번 하면 해외에서 보통 1억~1억 5000만원, 국내 경우에도 5000만원 정도가 든다. 이게 거의 투자되는 돈이고 이런 것을 근 20년 해왔다니 그의 말대로 ‘세상 물정과 다른 길을 가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한 방향으로 포기하지 않고 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앞으로도. 어느 정도가 되면 한 방향 가는 대신에 후배를 양성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KAAL E.SUKTAE’ 좌절과 재기 사이

그는 1994년 건국대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패션지 ‘멋’지에서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의 ‘파리가 세계 패션을 헤게모니를 잡는다’는 칼럼을 본 게 유학 계기가 됐다. 

파리 안착은 수월치 않았다. 파리에 도착해 현지 유럽 디자인 하우스 여러 곳에 포트폴리오와 편지를 직접 써서 취업 문을 두드린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팅을 가진 많은 하우스와 디자이너  모두로부터 “포트폴리오는 맘에 들지만 언어 소통이 문제”라는 답을 들어야 했다. 결국 취업 대신 학업을 선택한 그는 파리의상조합학교, 스튜디오 베르소를 졸업했으며, 소니아 리키엘, 크리스티앙 디오르, 니나리찌 등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디자인실 근무 이력도 쌓았다. 졸업 후 파리 신진디자이너 콩쿨에서 베스트10에 들어간 덕분이었다.

1997년 귀국한 그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던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면서 JDG컬렉션 멤버가 되면서 국내 패션계에 본격 편입했다. 이때 자신의 브랜드 '칼 이석태(KAAL E.SUKTAE)’를 론칭했다. 한국에 와 패션쇼를 하기 위해서는 브랜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왜 ‘칼(KAAL)’이냐고 물었다.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다소 심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추상적인 글자의 조합으로 엣지 있고 스트럭처 한 걸 좋아하는 데다 그에 잘 맞는 타이포그라피와 발음이 맘에 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브랜드 론칭 후에는 서울 갤러리아백화점 본점에 매장도 냈다. JDG컬렉션과 SFAA 컬렉션 등을 통해 유명세를 더한 결과였다. 그러나 5년 정도 브랜드를 운영하다 결국 폐업을 하게 된다. 디자인력에 비해 경영마케팅력이 떨어졌고 소비자와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석태 디자이너 본인에겐 자기 인생 1막인 셈이다.

이후 직장생활을 한다. 'Y&K' 디자인실장, '이상봉 파리스 컬렉션' 실장, 'YK038' 디자인실장... 6년 동안 그가 경험한 '필드'다. 2004년 그는 가로수길에 숍을 내고 재기에 나선다. 일종의 아뜰리에로 동업 형식으로 지하에서 시작했다. 고객을 포함, 주변 반응은 뜨거웠고, 이 곳에서 작업도 하고 직접 소비자와도 만났다. 이석태 인생 2막은 이렇게 꽃을 피웠다.(가로수길 컨셉숍을 정리한 게 2012년. 직후 현재 쇼룸인 신사동으로 옮겼다)

동시에 이석태 3막이 시작된 곳도 이곳이다. 서울컬렉션 담당자들이 찾아와 다시 컬렉션을 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2008년 10월 24일 브랜드 '칼이석태'는 6년만에 '2009 S/S 서울컬렉션'으로 화려하게 재기한다. 무엇보다 해외 바이어 평가가 좋았다.   

"서울 컬렉션 직후 해외바이어들의 전화가 너무 많이 와 스스로 놀랄 정도였어요. 재기해서 새로운 컬렉션을 한다는 생각뿐, 해외 비즈니스는 생각을 안하고 있을 때였는데, 미국과 중동 바이어들 반응이 좋았어요. '내가 해외에 통하는구나, 국내에서는 망했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컬렉션을 하다 2010년 당시 디자인 지원사업을 많이하던 서울시가 선정한 '텐소울(Seoul's 10 soul)'에 뽑힌 건 이석태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또다른 기회였다. 이는 서울컬렉션 디자이너 중 10명을 뽑아 국가가 지원해 해외에 내보내는 일종의 글로벌 브랜드 육성 프로젝트였다.

이게 본격적인 해외 진출의 계기가 됐다.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패션트레이드쇼인 '파리 트라노이'에 참가하게 된다. 그렇게 해외에 나갔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들으면 알만한 유명 숍들에서 바이어들이 옷을 사갔다" 이석태 본인으로서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루이비통 CD, 기회 주어지면 하고 싶다"

해외진출 초기의 에피소드 하나. 2010년 텐소울에 뽑혀 처음 해외 전시 바이어를 만나러 갔는데 당시 가. 그의 옷을 홍콩 10개 매장에서 서로 사가겠다고 싸움이 났다. 물론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소비자 교감도 안됐는데...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니까 이런 인정도 받는구나' 그때 기억은 여전히 그에게 화인(火印)처럼 박혔다.

"현재는 해외 비즈니스 활동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뉴욕 컬렉션도 하고 있구요. 전세계 괜찮은 숍에 들어가서 각 나라 패션 리더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규모를 늘리는 게 아니라 고가의 창의적 디자인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어요. 현재 안정기이고, 원활히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브랜드 'KAAL E.SUKTAE'에 대한 해외 투터운 호의는 계속되고 있다. 파리, 뉴욕, 런던, 싱가폴, 홍콩 등 전세계 20개 넘는 유명 숍들이 'STOCKIST'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디자인 브랜드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고, 해외에 집중한 결과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중동지역, 아시아권, 유럽, 미국 등 전세계 안들어가는 매장이 없"을 정도다. 

브랜드 'KAAL E.SUKTAE'는 해외에서 더 빛을 발한다. 해외 컬렉션을 준비중인 이석태 디자이너. /사진=칼이석태 디자인실
"한국 시장은 하나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 국내 유통의 문제이기도 한데, "옷 좋다" 이러면서도 옷을 100% 사가는 게 아니라, 임대식으로 팔리면 수수료를 떼가는 식이다. 결국 한국 유통 시스템 스스로 자기 나라 디자이너 옷을 인정하지 않는 셈인데, 디자인만 보고 선뜻 사가는 외국에 비춰, 국내 패션 디자이너로서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의 옷은 외국 명사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하다. 세계적인 가수 레이디가가 콜라보를 먼저 제안해 온 것도 그 일화 중 하나다. 시간 조율이 안돼 무산됐지만, 재밌는 기억이다.

러시아의 유명한 패션 블로거이자 매거진 바자 러시아의 에티터, 또 패션 아이콘이기도 한 미라슬로바 듀마가 컬렉션 기간 그의 옷을 입고 파파라치 앞에 섰던 일, 유명 DJ이자 영화배우겸 모델인 데본 아오키(Devon Aoki. 분노의 질주2, 씬시티, DOA 등 출연)의 친오빠이기도 한 스티브 아오키(Steve Aoki)가 그의 옷 매니아로서 직접 주문해 입는다는 사실 등도 왕왕 업계 회자된다.

"이것만은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이라고 물었는데 다소 답이 엉뚱했다. "불가능한 얘기같지만 해외의 유명 브랜드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하고 싶습니다. 루이삐통 CD인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도 크리스찬 디올의 CD도 모두 저와 동갑입니다. 해외에서는 남자들도 많이 여성복 브랜드를 가져갑니다. 최고급 브랜드 수장으로 역할을 맡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석태가 말하는 디자인·디자이너

지금은 해외 비즈니스에 집중하는 그에게 당돌하지만 '디자인'을 정의해달라고 했다. "쉽게 얘기하면 청소"라고 그가 답했다. 조금은 의아했지만, 곧 쉬운 뜻풀이가 이어졌다. 아무거나 막 여러가지가 놓여있는데, 이를 취사선택해 어떤 형태로 놔두느냐, 정리하는 것, 청소하는 것이 디자인 속성을 닮았다는 것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예요. 갖고 있는 경험과 이미지, 주위 영감들을 정리해 이번에는 이렇게 정리정돈하자고 결정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그 연장선에서 '디자이너' 역시 "새로운 걸 만드는 사람"이라는 게 그의 규정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이죠. 기존 것들을 가지고 리디자인하면서 재창조하는 것.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돌도 멋진 조각상으로 태어나듯 같은 원단, 소재를 갖고도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여줘야 합니다."

지난 3월 열린 2015 F/W 서울패션위크에서 그가 선보인 이른바 '둘리 패션'도 화제였다. 어떤 소통을 위한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둘리 캐릭터는 앞서 지난해 뉴욕에서 열린 개인 컬렉션에서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뉴욕 단독 컬렉션인데 소재를 찾던 중 해외 미키마우스처럼 우리 고유의 공룡 캐릭터인 둘리에 착안, 김수정 작가에게 협업을 제안했죠. 작가님은 처음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왜 둘리가 아동용으로만 소비될까, 한국의 대표적인 캐릭터인데 하이패션으로 한번 가보자. 그런 그의 생각에도 불구, 김수정 작가는 "아동용이고 약간 키즈한 스타일인데 어떻게 아방가르드한 실험적인 의상에 어울리겠느냐"며 반대했다고. 이걸 설득했다. "믿고 맏겨달라, 새롭게 표현해보겠다." 

막상 옷을 좋아하는 김수정 작가의 승낙이 떨어졌을 때 고민은 더 했다고. "그런 시도가 처음이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건 유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귀여움을 살리면서도 고급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자수를 두껍게 올리는 등 다양한 기법을 달리 써봤다.

"반응이 넘 좋았어요. 외국인들이 둘리를 모르지만 일단 귀엽다는 거, 그리고 한국의 유명한 공룡이라고 하니까 공감대가 컸습니다. 판매도 잘 됐고 덕분에 둘리 작가님도 '감동 받았다'며 만족해 하셨죠."

지난 3월국내에서도 역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석태의 둘리'는 현재 티셔츠 판매에 이어 남성용과 여성용 의상으로 개발 중이다.(이날 인터뷰 당일에도 이석태 디자이너는 둘리가 가슴팍 큼지막한 옷을 입었다)  

쇼룸에 선 이석태 디자이너. 그에 따르면 신앙심과, 열정, 꿈이 오늘날 자신을 만들었다. /사진=송의주 기자songuijoo@
콜라보는 또다른 형태로도 잦다. 그에 대한 그의 원칙. "딱 한 가지, 새로운 걸 만들 의향이 있는 지"를 본다. 선글라스, 향수, 소파, 신발 등 다양한 분야 협업이 그동안 이뤄졌다. 신발의 경우 스와로브스키와의 콜라보가 매년 진행되는 데 이번 파트너는 제프리 캠벨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향수다. 한 개인과 헙업, 프로토타입을 컬렉션에서 선보였는데 반응이 넘 좋았다고. 아쉽게도 투자자를 못 만나 상업화는 보류됐다.

후학 양성, "후배들 시행착오 줄여주고 싶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아시아쪽 패션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샤넬이 한국에 와 직접 디자인한 한복 패션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트렌드의 이유는 뭘까?

"패션 종주국은 프랑스입니다. 프랑스 디자인 제작의 하청국이었던 이태리가 기술력을 바탕으로 상업화에 성공했고, 이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뉴욕 패션에 주도권을 넘겨줍니다. 다시 창의적이지만 이태리와 다른 상업적인 느낌을 갖는 벨기에 패션이 주류가 됐고, 이 바람이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요지 야마모토가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 더 이상 갈데가 없죠."

패션은 숙명적으로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속성이 있다. 아시아 경제가 살아나면서 다이나믹하게 성장했고, 이 가운데 한국 패션이 주목받게 됐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K팝 등 한류바람도 한 몫 했다. 샤넬쇼에 가는 지드래곤(빅뱅), 루이비통 콜렉션에 참가하는 배두나 등, 패션에 관심 갖는 한국 이미지도 그만큼 세련돼 갔다.

젊은 친구들의 왕성한 활약상도 눈여겨볼 만 하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디자인력이 뛰어난 특히 현지 2세들이 이러한 흐름을 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가 꼽는 신진디자이너로는 독일 2세로 미국에서 남성복으로 활동하는 시키임(Siki im, 임상균). 옷 만드는 거 하나는 세계 최고로 손색 없다는 준지(정욱준)가 이름을 올렸다.

그는 현재 4년째 서울종합예술실용학과 교수로 강의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대학 졸업작품 심사, 전문학원 출강 등으로도 분주하다. 

"나중에 뭔가 학생들에게 한 우물을 계속 파서 갖고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교육기관이나 어떤 형태로든 시행착오를 줄이고 창의적 디자이너가 돼 론칭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지금도 머릿속에는 이를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디자인이 순조롭게 나오지 않을 때 후배 양성을 본격화할 것입니다."

디자이너란 직업, 평생 가져갈 순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느 순간 아이디어 고갈 시점이 온다고. 그 순간이 됐을 때 이룰 그의 꿈. "양현석씨 처럼 훌륭한 연예인 매니저먼트가 있쟎아요. 조력자로서 '디자이너 매니지먼트' 이런 걸 하고 싶습니다. 보람을 거둘 수 있는 마무리 꿈이라고 봐도 돼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3요소'를 꼽아달라고 했다. 가장 먼저 그는 '신앙심'을 얘기했다.(참고로 그의 카카오 상메(상태메시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이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갖고 이를 디자인적으로 표현한 사례가 다수라고.(그는 자기 삶을 "의외로 단순하다"고 평한다. 일하고 퇴근하고 친구들 만나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일요일 교회 가고... 심플한 삶이 좋고, 복잡한 인간관계를 골치 아파한다. '옷 만들려면 단순화 시켜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또 하나 꼽는 게 '열정'. "그게 전부"라고 할 정도. 회사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무슨 일을 해도 뛰어다녔다고. 마지막 그의 존재의 이유는 '꿈'이다. "다 미치진 못했지만, 꿈이 컸기 때문에 지금 제 상황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자평이다.

/사진=칼이석태 디자인실
마지막 질문. '10년 뒤 칼 이석태에게 한마디'를 주문했다.

'공생'의 롤모델로 'LVMH 모엣 헤네시·루이 비통(LVMH Moët Hennessy·Louis Vuitton S.A.)'을 예시했다.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LVMH는 1987년 루이비통 패션하우스와 모엣 헤네시 양사 합병의 결과물이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갖고 있는 것을 나누면서 보람을 찾아야 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 LVMH 모델로 실력있는 디자이너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공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돈을 가진 투자자들은 오블리스 오블리제를, 소비자들은 획일화 아닌 자기 개성의 존중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특히 부의 과시가 사회적 성공으로 인식되는 국내 현실에서 실력과 자존감만으로 전문가가 전문가일 수 있는 사회 개조도 역설한다. '돈이 패션을 잠식하는' 사회야 말로 불행한 사회다, 어쩌면 그는 그런 단죄로 우리 사회 '문화와 예술의 발전'을 요구하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