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혁명 40주년, 여진에 여전히 흔들리는 중동 정치판

親美 왕정 몰아내고 이슬람주의 확대
시리아·예멘 내전 개입 反美세력 형성
정부 "혁명 계속 진행중" 강조하지만
물가 상승·높은 실업률 '빈곤악순환'
美 제재 복원되면서 경제적 압박 심화

최서윤 기자|2019/02/11 16:41
11일 이란 거리 곳곳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수백만 명의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이란 이슬람 혁명 40주년을 맞아 기념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다. 40년 전인 1979년 2월 11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친미(親美)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고 혁명 승리를 선언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중동 지역에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냈고, 중동 정치판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혁명 여진에 흔들리고 있다.

알자지라 방송·AFP통신·NHK 등 외신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이란의 이슬람 혁명 40년을 축하하는 대규모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영국 국제문제전략연구소(IISS)의 클레멘트 테르메 연구원은 “호메이니가 샤(Shah·왕을 의미)의 마지막 정부를 축출했을 당시 중동을 비롯한 전세계는 반미 이슬람 혁명의 승리에 엄청나게 놀랐다”고 말했다. 팔레비 왕조 출신의 통치자 모하메드 레자 샤 팔레비는 미국과 소련이 군비경쟁을 벌이던 냉전시대에 중동 지역에서 미국이 소련 영향력 확대를 막는 방패이자 체제 안정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호메이니의 승리로 왕조 시대는 막을 내렸다.

호메이니 정권이 신정일치의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한 후 처음으로 추진한 대외 정책은 미국 외교관을 상대로 한 인질극. 1979년 11월 주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444일간 외교관 등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이란과 단교했다. 중동 대표 친미 국가였던 이란이 최대 반미 국가로 급변한 순간이다.
미 대사관 점거 사건의 파급력은 국내를 넘어 국외로 뻗쳤다. 중동 전 지역에 걸쳐 왕정 세력과 지배 엘리트층을 위협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확대시킨 것. 원리주의 성향의 이슬람 사상인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장조직 이크완은 이란의 혁명 승리 및 세속적 외세 상징인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에 고무돼 1979년 11월 이슬람 성지 메카를 무장 점거했다. 당시 이크완은 사우디 왕실이 점점 세속화한다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란은 1988년 이라크와의 전쟁을 8년 만에 끝낸 후 미국 영향력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했다고 미국의소리(VOA)는 전했다. 이란 극보수 매체 야완(Javan)의 압둘라 간지 편집국장은 “이란은 지난 30년간 미국이 중동에 거점을 두는 것을 막아왔다”면서 “시리아·예멘·레바논과 미국이 동맹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계속 개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란은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정부, 예멘 내전에서 예멘 반군,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등 미국의 반대편에 서서 중동 내 친(親) 이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란 정부는 이란 이슬람 혁명이 군주제 몰락과 함께 멈춘 게 아니라 계속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이슬람 혁명 40주년을 맞아 최근 “미국이 깊이 참회하고 기존의 접근 자세를 바꾸면서 이란에 개입한 과오를 사과한다면 우리를 수십년간 탄압했음에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며 “미국은 이란 국민과 이란의 장엄한 존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과 관련, “미국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원하지만 그들의 안전은 오직 팔레스타인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만이 보장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테르메 연구원은 “호메이니의 유산인 전투적 반시온주의(Anti-Zionism·반유대주의)가 이란 외교 정책의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라며 “하지만 현재 이란의 지정학적 최우선 목표는 이슬람공화국의 지속”이라고 평가했다. 이란 사회는 물가 상승과 만성적인 고실업으로 빈곤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는 미국의 이란 제재가 복원돼 경제적 압박도 심해지고 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진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