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이를 먹으면 알 수 있는 것들
2020/09/28 13:07
|
그런데 이런 추잡한 권력의 몰락을 가장 빨리 견인하는 것은 놀랍게도 자식이다. 자식은 부모가 그때껏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허물고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평생을 걸고 주유했던 젊은 날의 지향과,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지고지순한 가치는 자식이라는 피붙이 앞에 단숨에 너덜너덜해진다. 자식으로 인해 고개 숙이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전직 대통령들의 참담함을 굳이 입에 담지 않더라도, 입시와 군대라는 국민적 역린(逆鱗)을 건드려 ‘공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전·현직 법무장관과, 수억 원에 달하는 자녀 유학비의 출처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전직 ‘위안부 할머니 수호천사’를 통해 능히 알 수 있다. 설사 저들의 주장이 다 맞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저런 엄마, 아빠를 가지지 못한 아이들은 감히 시도조차 못하는 극한의 호사(豪奢)임은 분명하다. ‘엄마 찬스’ ‘아빠 찬스’ 돌림노래가 왜 끊이지 않고 횡행하는지 더욱 겸허하게 곱씹어 봐야 한다.
거창한 세상사의 거대 담론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게 되면 소소한 일상의 어제와 오늘, 그 소담한 단상(斷想)과 편린(片鱗)에서도 무심코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자식 얘기를 좀 더 보태자면, 자식은 태어나서 6살 때까지 평생 부모에게 해야 할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년의 자식은 부모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지만, 부모는 그런 자식이 철들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철든 자식 앞에 놓인 것은 언제나 부모의 무덤뿐이다. 애써 불가(佛家)의 진리에 의탁하지 않더라도 삶은 고통 그 자체이고 삶이란 고행길에서 우리가 정말 행복했던 순간은 손에 꼽는다. 그래서 늘 바빠만 보이는 우리의 인생도 실상은 별 의미 없는 어떤 하루의 끊임없는 반복이자 쉼 없는 재생일 뿐이다. 탁월한 자기 견성(見性)의 성인(成人)들의 삶을 굳이 소환하지 않더라도 40고개 늘그막 어디 즈음에서는 저절로 헤아리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살아있는 남은 날들 가운데 가장 젊은 날이다.
어린 날에는 바람마저 소망하는 대로 불었다. 그 바람에 길을 묻고 얘기도 나눴다. 나이를 먹으면 온통 어긋나고 잊혀져가고 멀어져갈 뿐이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살리라 다짐하며 ‘사람욕심’ 버린 지도 오래됐건만 여전히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무엇보다 뜻대로 되는 일이 잘 없다. 사랑은 벌써 아득해졌다. 사실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했던 한 시절의 치기를 빼고 나면,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애틋한 연모의 정을 미처 다 주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갈림길을 만난 첫사랑의 소녀는 내 삶이 완전한 무(無)로 소멸될 때까지 만나지 않아야 비로소 첫사랑으로 완성된다. 어느새 이만큼이나 기울어버린 내 고단하고 비루한 인생길에 어느 날 갑자기 끼어든 정인(情人)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이미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은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