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선언 후 글로벌 기업 도약

美서 외면받는 제품에 충격...철저한 혁신 '신경영 선언'
불량 제로로 반도체 세계적 기업 등극...도전·결단 빛나

황의중 기자|2020/10/25 16:49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3년 신경연 선언을 통해 그룹의 체질을 바꿔놨다. 2004년 반도체 생산 공장을 살펴보고 있는 이 회장/제공=삼성그룹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면서 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이 한마디는 지금도 유명하다. 당시 그가 느꼈던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회장이 혁신에 나선 것은 삼성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는 통렬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그가 회장에 취임할 당시 삼성 임직원들은 국내 제일이란 자만에 빠져있었다. 질보다 외형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했고 부실은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그룹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취임 이후 조용히 그룹을 관찰하던 이 회장의 눈에 곧 포착됐다.

1993년 2월 이 회장은 임원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가전매장을 찾았다. 제품 진열장 한 귀퉁이에 삼성 제품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소비자들에게 외면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 하면 싸구려 제품이란 소비자들의 인식을 엿본 이 회장의 충격은 컸다. 그의 다짐은 이때 시작됐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에 삼성의 최고경영자(CEO)와 고위 임원들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삼성의 역사를 바꾼 신경영 선언이 나왔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에서 이 회장이 200여명의 임직원들에게 품질경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제공=삼성그룹
신경영 선언의 핵심은 철저한 혁신이다. “불량을 범죄로 여겨야 한다”는 이 회장의 방침은 불량품이 발생하면 그 즉시 라인을 멈추는 ‘라인스톱 제도’ 도입으로 이어졌다.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임원을 비롯해서 직원까지 위아래를 채찍질했다. 신경영 도입 후 삼성의 체질은 뿌리부터 달라졌다.

그의 도전 정신은 반도체 사업 초창기에 빛났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1983년께 이 회장의 결단은 삼성이 일본을 반도체 시장에서 제치는 계기가 됐다.

1987년 4메가 D램 개발 경쟁이 붙었을 때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지, 트렌치(trench) 방식으로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스택은 회로를 고층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고, 트렌치는 밑으로 파 내려가는 방식으로, 개발진 사이에서도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할지 의견이 양 갈래로 나뉘었다.
당시 회의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처음 시도하는 기술인 스택 공법을 도입하는 데 주저하자, 이 회장은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이 회장의 결정은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당시 트렌치 방식을 택했던 경쟁업체는 스택 방식을 취한 삼성전자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어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됐다.

이 회장의 결단은 휴대폰에서도 빛났다. 이 회장은 제품 불량률이 높자 충격 요법을 썼다. 1995년 3월 9일 시중에 판매된 휴대폰 15만 대를 전량 회수해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량품을 불구덩이에 넣었다. 이 사건은 전사적인 경각심을 불어넣었고 제품 완성도는 현격히 높아졌다.

권오현 삼성전자 고문은 오늘날 삼성이 있기까지 이 회장의 공이 컸다고 증언한다. 권 고문은 28주년을 맞아 진행된 사내 인터뷰에서 “전문경영인 입장에서는 사업이 적자를 보거나 업황이 불황인 상황에서 ‘몇 조를 투자하자’고 제안하기가 쉽지 않다”며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한다는 자체가 난센스이던 당시 이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