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kaoTalk_20221211_204014732_01 | 0 | '12월 12일 퍼(베트남 쌀국수)의 날'을 맞아 베트남 북부 남딩성에서 전통 퍼를 준비하고 있는 반끄마을 요리사들의 모습./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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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지배 치하의 애환을 녹여내며 시작된 '퍼(pho)'는 이제 베트남 문화의 정수가 됐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12월 12일 따뜻한 퍼 한그릇을 즐기며 베트남과 가까워지길 바랍니다" 10일 베트남 북부 남딩성(省)의 반끄 마을, 백발이 성성한 마을 원로는 기자에게 "한국 겨울이 무척 춥다 들었는데 마음 같아선 12일에 한국사람들에게도 우리 마을의 쌀국수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인 10~11일 베트남 북부 남딩은 전국 각지에서 몰린 손님들로 북적였다. 미국·중국부터 이란·핀란드·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주재 외국 대사관의 외교관들도 남딩을 찾았다. 베트남 유력매체인 뚜오이쩨가 중앙·지방 유관부처들과 함께 베트남 쌀국수인 '퍼'를 알리기 위해 시작한 '12월 12일 퍼의 날' 행사가 퍼의 발원지로 여겨지는 남딩에서 열린 덕분이다.
남딩을 찾은 이들은 직접 퍼를 만들기도 하고, 베트남 최북단 하장성(省)에서 남부 붕따우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의 퍼의 요리 과정을 보고 맛을 즐기기도 했다. 베트남 전역에서 경합을 걸쳐 올라온 퍼 가게의 요리사들이 요리 경연을 통해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셰프들은 행사장에도 부스를 차려 1만동(약 550원)짜리 티켓 한 장에 수준급의 퍼 한그릇을 제공하기도 했다.
◇ 지역마다 재료마다 무궁무진한 베트남의 퍼바잉미와 함께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인 퍼가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기원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프랑스 식민지배 시기였던 20세기 초, 당시 봉제 공장이 밀집했던 남딩에서 노동자들이 먹기 시작하며 등장했다는 설이다. 남딩의 반끄마을이 대표적인 발원지로 꼽히고, 오늘날 이곳 주민들의 친인척 대부분이 남딩은 물론 하노이 등 베트남 곳곳에서 몇 대에 걸쳐 쌀국수집을 운영해오고 있다. 흔히 베트남 북부 쌀국수가 '원조'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 KakaoTalk_20221211_204014732 | 0 | 11일 베트남 남딩성 반끄마을에서 퍼에 쓰이는 면(banh pho)을 직접 만들고 있는 요리사의 모습./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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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시대 애환이 어린 쌀국수 퍼는 호주·미국·유럽과 한국 등 세계 곳곳에도 퍼졌다. 베트남과 세계 전역으로 퍼지며 '퍼'도 무궁무진하게 변화했다. 한국의 경우 남부 출신 보트피플들이 주를 이룬 미국식 베트남 퍼가 먼저 들어왔다. 고향이 남딩성인 베트남 외교부 관계자는 "퍼에 관해서는 '어떠해야만 한다, 어떤 퍼가 가장 맛있는 퍼다' 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지역마다 특징이 다 다르고 그것 또한 퍼의 매력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는 "대체로 하노이 퍼는 국물이 맑고 깔끔한 편이고 남딩의 경우 국물 맛이 무겁다 싶을 정도로 진하고 향신료가 풍미를 더한다. 호치민시 같은 남부의 경우엔 국물이 조금 더 단 편이고 북부와 달리 숙주나 해선장 등의 소스를 곁들여 먹는다"고 설명했다.
| KakaoTalk_20221211_202704780_22 | 0 | 11일 베트남 남딩성에서 열린 '퍼의 날' 행사장에 차려진 돼지고기 차슈 퍼 부스의 모습./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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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퍼는 퍼 보(Pho bo), 소고기 쌀국수다. 흔히들 퍼 보와 닭고기 쌀국수인 퍼 가(Pho ga) 두 종류만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 종류는 더욱 다양하다. 돼지 뼈를 우려낸 육수에 중국의 차사오·일본의 차슈와 같이 양념에 재워 구워낸 돼지고기인 싸씨우(Xa xiu)를 얹으면 돼지고기 퍼인 퍼 씨우(Pho xiu)가 된다. 고소하면서도 기름진 풍미가 느껴지는 돼지 육수에,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돼지고기가 올라가 소고기 쌀국수와는 또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다.
| KakaoTalk_20221211_202704780_27 | 0 | 오리뼈를 고아 낸 육수에 화덕에서 구운 오리를 얹어 만드는 오리고기 퍼(Pho vit)./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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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에서 구워내는 것으로 유명한 북부 랑썬성(省)의 오리도 훌륭한 퍼로 변신할 수 있다. 오리 뼈를 푹 고아서 생강·양파·레몬그라스 등을 더한 육수에 화덕에서 잘 구워낸 오리고기를 썰어 올리면 진하고 깊은 맛이 특색인 퍼 빗(Pho vit)이 된다. 퍼 빗과 함께 화덕 오리구이를 내 준 셰프 쩐 민 하인씨는 "퍼를 먹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짜잉(라임)을 짜넣는 경우가 많은데 가급적이면 라임을 짜넣지 말고 요리사가 의도한 본연의 육수 맛을 즐기길 권한다"고 덧붙였다.
| KakaoTalk_20221211_202704780_14 | 0 | 쌀 농사가 어렵고 옥수수 재배가 쉬운 베트남 북부 하장성의 흐몽족 요리사가 선보인 옥수수 퍼(Pho ngo)./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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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 최북단 하장성의 '옥수수 퍼(Pho ngo)'도 소개됐다. '그럼 쌀국수가 아니라 옥수수 국수 아닌가' 싶지만 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풍미는 모두 갖췄다. 고산지대라 쌀을 구하기 어려워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는 많은 하장성의 지역적 특색을 살린 것이다. 하장에서 온 셰프는 "옥수수 퍼에 풍미를 더하고 싶다면 죽순을 담가 놓은 죽순 식초를 곁들여 먹어보라"고 권한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셰프 응우옌 통씨도 본지에 "퍼는 지역마다, 만드는 사람마다의 특색을 반영해 무궁무진하게 변할 수 있는 음식"이라며 "기회가 된다면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한국에서도 한국 식재료 본연의 맛과 어우러지게 특색을 살린 퍼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 KakaoTalk_20221211_202704780_06 | 0 | 행사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베트남 이민자가 많은 호주의 특색을 살린 퍼를 소개하고 있는 응우옌 통 셰프./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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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는 사랑을 싣고
이번 행사에는 베트남 주재 외교관과 가족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까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3대가 함께 찾아 쌀국수를 즐긴 응우옛(42)씨는 "퍼의 고장이라는 남딩에 살고 있지만 퍼를 주제로 이렇게 단일 행사가 크게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가족 모두가 나왔다"고 했다.
부 뚜언 뚜오이쩨 기자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퍼는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본지 기자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라 말했다. 퍼가 프랑스 식민시대,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살 수 밖에 없던 베트남인들의 어려운 형편에서 시작된 음식이라 설명한 그는 "중국부터 프랑스·미국의 침략을 겪으며 끊임없는 전쟁에서 어렵게 살아온 베트남 민족에게 퍼는 늘 '당기는 음식', '생각나는 음식'이다. 따뜻한 퍼 한그릇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애환을 베트남 사람 모두가 간직하고 있다"며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베트남인들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리고 가장 먹고 싶어하는, 베트남 사람들과 떨어뜨릴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퍼다"라고 답했다.
| KakaoTalk_20221211_202704780_24 | 0 | '5000동(280원) 퍼' 가게에서 판매하고 있는 5천동·1만동·1만5000동 쌀국수./사진=남딩 정리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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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딩에서 유명한 '5000동(약 280원) 퍼' 가게도 이날 행사장에 부스를 차렸다. 주인인 응우옌 티 쭝씨는 18년째 가게를 운영하며 학생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에 퍼를 판매해왔다. 지금도 실제 5000동 퍼를 판매하고 있다. "여차하면 배곯기 쉬운 학생들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이윤을 남기지 않고 판매하는 것"이라는 쭝씨는 "가게에서 곤계란이나 냉차·음료를 팔아서 적자를 만회하고 또 가게 취지에 공감해서 퍼 한그릇을 먹고 10만동(약 5500원)·20만동(1만1000원)씩 내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 손해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사 주최측도 매년 퍼를 먹어본 적도 없을 정도의 오지에 사는 소수민족들이나, 코로나19 당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고생한 의료진들을 찾아가 직접 따뜻한 퍼를 제공하는 '사랑의 퍼 차량' 행사를 진행해왔다. 행사 관계자는 "올해 '퍼의 날' 행사는 티켓 판매 등 행사 수익금을 모두 남딩성 뇌성마비 아동들의 가정을 지원하는데 사용된다"며 "사랑의 퍼 차량도 세차례에 걸쳐 남딩성·타잉화성·호치민시 등을 찾아 사랑을 나눈다"고 전했다.
정리나 남딩·하노이 특파원
hanoian@as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