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운사 | 0 | 겨울 고즈넉한 선운사는 마음을 살필 세밑 여행지로 어울린다. 눈이 내리면 풍경은 더 우아해진다./ 고창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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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의 겨울은 한갓지다. 세밑에는 이런 곳이 여행지로 어울린다.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 순해져서다. 이래야 지난날을 반추하는 일도, 앞날을 그리는 일도 수월해진다. 고창은 행정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이다. 자연과 생태계가 풍요롭고 건강하다는 얘기다. 유서 깊은 문화유산도 많다. 이러니 눈 돌리는 곳마다 일상의 먹먹함을 풀어줄 풍경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마음 편안해질 곳 추렸다. 일단 선운사는 기억하자. 여긴 고창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다. 아산면 선운산(도솔산) 기슭에 있다.
선운사는 동백나무 숲이 유명하다. 미당 서정주, 가수 송창식의 애를 태운 동백꽃이 여기에 핀다. 선운사 동백꽃은 춘백이다. 여느 곳보다 개화시기가 조금 늦다. 가을에는 꽃무릇이 동백꽃을 대신한다. 꽃무릇은 가냘픈 꽃잎이 참 아름다운 식물이다. 그런데 꽃과 잎이 결코 만나지 못한다. 꽃잎이 떨어져야 잎이 돋고 잎이 시들어야 꽃이 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무릇은 그리움의 상징이 됐다. 가을이 되면 전설같은 애틋함을 좇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녹음 짙은 여름, 단풍무리 내려앉는 만추(晩秋)의 풍경도 빼어난 선운사다.
그럼 이 계절에는? 고요하다. 3, 4월이 절정인 동백꽃을 기대하기는 좀 이르고 꽃무릇은 철이 아니다. 이러니 인적이 뜸하다. 그런데 왜 지금 가야할까. 사위가 적요한 겨울 산사를 기웃거려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갈 일이다. 마음이 순해지는데 이 만한 곳이 없어 보인다. 한줄기 바람에 숨통이 트이고 맑은 풍경소리에 귀가 트인다. 눈 내리면 '효과'는 배가 된다. 도솔천을 따라 경내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운치도 좋다. 여기까진 길이 판판해 걷기도 편하다.
선운사는 백제의 사찰로 전한다. 조선후기에는 8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세가 컸다. 지금은 10여 채의 가람이 남았다. 경내 구경 끝내고 도솔암을 거쳐 낙조대까지 내쳐 다녀오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 낙조대는 이름처럼 해넘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깎아지른 암봉에 서면 시야가 탁 트이고 아득히 서해가 펼쳐진다. 선운사에서 낙조대까지는 약 1시간 거리. 막바지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지난날을 곱씹으며 쉬엄쉬엄 걷기에 어울리는 코스다. 하나만 추가하면 고창은 풍천장어가 유명한데 선운사 들머리에 풍천장어를 내는 음식점이 많다.
| 고창읍성 | 0 | 고창읍내를 조망하며 산책할 수 있는 고창읍성/ 고창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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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의 고창읍성도 조용한 산책에 어울린다. 고창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전북 정읍 입암산성, 전남 영광 법성진성과 연계 해 호남내륙 방어를 위해 축조됐다.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불린다. 고창의 옛 이름이 '모량부리'다. 여기서 비롯됐다. 원형이 잘 보존됐다. 영화 '사도'(2015),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2018)에도 등장했다. 치열한 역사도 흐른다. 북문 인근 치성에서 3·1운동(1919) 당시 고창청년회 회원과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안에는 관아를 비롯해 20여 채의 건물들이 있었단다. 지금은 일부만 복원됐다.
성곽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고창읍성에는 예부터 성 밟기 풍습이 전한다. 여성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을 돌았다.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낳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고 믿었단다. 특히 윤달, 그 중에서도 윤삼월에 해야 효험이 많았단다. 그리고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등 여섯수가 든 날은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여성들이 부지기수였단다.
| 복분자팡에이드 | 0 | 고창 특산물 복분자로 만든 '복분자팡에이드'/ 고창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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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또 있다. 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을 즈음 성곽을 튼튼히 다지기 위한 행위였단다. 요즘도 음력 9월 9일에 성 밟기 놀이가 행해진다. 꼭 이 때가 아니어도 수시로 고창읍성을 찾아 성곽 길을 걷는 주민들이 다수다. 성곽 둘레는 약 1.7km, 게으름 부리며 걸어도 1시간이면 완주 가능하다. 성곽 따라 걸으면 정겨운 읍내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조선 판소리를 중흥 시킨 동리 신재효 고택이 고창읍성 앞에 있다. 그는 이 고택에서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판소리 여섯 마당의 가사를 정리하고 이론을 세웠단다. 함께 둘러봐도 좋다. 2023년에는 고창읍성 일대에 즐길거리가 늘어난다. 고창군은 2023년을 '고창방문의해'로 선포했다. 이에 맞춰 볼거리, 즐길거리를 공들여 준비 중이다. 수박, 멜론, 복분자, 땅콩, 고구마, 인삼, 보리 등 농·특산물을 활용한 음료와 디저트 메뉴 개발도 마쳤다.
| 사본 -고창고인돌유적지2 | 0 | 고창고인돌유적지/ 고창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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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림저수지 가창오리떼 | 0 | 가창오리떼의 군무를 볼 수 있는 동림저수지/ 고창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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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면 고창운곡람사르습지도 호젓하게 산책할만한 장소다. 여기 깃든 사연이 흥미롭다. 운곡마을 주민들은 습지의 일부를 계단식 논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1980년대 운곡댐이 들어선 후 마을이 수몰되며 떠났다. 이후 30여 년간 인적이 끊기자 습지는 원래의 생태계를 되찾았다. 멸종위기 야생 동물인 수달, 삵, 담비와 천연기념물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등 총 86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한다. 습지는 생명력 넘치는 여름이 싱싱하지만 겨울의 한갓진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숲길을 따라 이어진 탐방로를 걷는 것만으로 도시생활의 먹먹함이 풀어진다.
탐방로가 잘 정비돼 있다. 총 4개 코스가 있는데 이 가운데 1코스(3.6km)가 인기다. 고창의 또다른 문화유산인 고인돌을 볼 수 있는데다 거리도 짧다. 50분이면 완주 가능하다. 고창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테이블 모양의 북방식,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성내면 동림저수지를 메모하자. 겨울이 되면 이곳에서 가창오리떼 수십만 마리의 군무가 펼쳐진다. 고요함 속에 펼쳐지는 '자연의 향연'을 렌즈에 담으려는 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멀리서 애써 찾아온다. 해넘이도 예쁘다. 붉게 물든 하늘과 물비늘이 반짝이는 저수지, 갈대가 어우러진다.
세밑에 고창에 간다면 겨울 산사에 앉아 게름을 부리고 오래된 성곽을 따라 마음 살피며 산책을 하고 천연한 자연을 벗삼아 해넘이를 구경하자. '힐링'이 별거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김성환 기자
kshwan@as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