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3주년] 사진 한장 남지 않은 영웅의 73년 걸린 귀향기
형 따라 17살 입대한 이승옥 이등중사 73년만에 뼈 3점만 가족품으로
포로로 잡힌 형과 총부리 겨누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인공 될 뻔
이석종 기자|2023/06/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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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를 기억못할 정도로 하루하루 치열했던 전투, 그리고 지옥같던 포로생활과 이어진 탈출.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남과 북이 6·25 전쟁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고(故) 이승옥 이등중사(현 계급 병장)의 친형 고(故) 이승길씨가 전라북도 정읍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국군이었던 승길씨 본인의 이야기를 전한 유족들에 따르면 그는 개전 초기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포로 신분으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강제 노역을 하던 그는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생각에 동료 2명과 함께 국군들을 찾아 탈출을 결심했다. 그러나 동료들이 먼저 발각돼 사살돼자 이승길씨도 같이 죽은 척했다. 구사일생으로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돌아온 이승길씨는 눈앞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가까운 거리의 고향 정읍으로 달렸고 결국 보고싶은 어머니 품에 살아있는 목숨으로 겨우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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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14일 전북 정읍에서 2남 3녀 중 넷째(차남)으로 태어난 고(故) 이승옥 이등중사. 그는 친형의 양복점에서 일을 도우며 청년의 꿈을 키워가던 중 6·25 전쟁 발발 1년여 전인 1949년 7월 만 17세의 나이로 국군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자진 입대했다. 먼저 군에 입대한 형(고 이승길 씨)을 따라 나라를 지키는 일에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두 형제의 어머니는 군에 간 아들들을 그리워하며 매일 아침 기도를 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초기 국군이 인민군에 밀리면서 끊어진 형제 소식에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더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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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사실은 6·25의 포성이 멎고도 73년이 지난 2023년에서야 유가족에게 전달됐다. 이승길씨의 아들이자 이승옥 이등중사의 조카인 이천수(71)씨는 지난 4월 작은 아버지의 유해 일부를 확인했다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연락을 받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생전 할머니와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를 찾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지난 현충일(6일) 한 프로야구 구단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함께 현충일 기념 일환으로 진행한 행사에서 전사자 가족 신분으로 프로야구 시구자로 나섰던 이 씨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기동탐문관이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작은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못했다"며 "유해발굴감식단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사진도 한장 없는 작은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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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의 유품은 식별되지 않았지만, 수류탄과 박격포탄 등 폭약류가 다수 출토된 지역이고, 유해 또한 뼈가 부분적으로 흩어진 상태로 발굴된 점을 고려했을 때 전쟁 당시 치열한 화력전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설명이다.
이렇게 발굴된 이승옥 이등중사의 유해는 6·25전쟁 발발 73주년을 앞둔 지난 22일 이름도, 얼굴도 서로 모르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전우 2명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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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아니라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6·25 전사자가 12만 1879명(2022년말 기준)에 이른다. 이들의 유해도 하루빨리 찾아 기다리는 가족의 품에 안겨드려야 하는 게 국가의 책무다.
박정환 육군참모총장은 지난 22일 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합동안장식에서 "여전히 후배들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13만여 호국영령님들을 끝까지 찾아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