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정치인(Politian)과 정치가(Statesman)의 차이는 무엇일까

강성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2023/07/27 20:00
강성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61년 9월 30일 당시에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칼럼니스트였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게 신문을 통해 공개편지를 썼다. 그것은 쿠바의 침공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삼는 케네디 대통령의 방식을 다루었다. 대통령은 자기의 보좌진들에 의해서 권고된 두 개의 양립할 수 없는 노선들 가운데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는 필요하다면 미국의 군사력으로 쿠바에 침공을 벌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쪽의 길이든 그것이 내포할 모험을 피하기 위해서 대통령은 중간의 길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단지 조금 개입하지만 그러나 성공을 보장할 만큼 충분히 개입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런 흑과 백 사이에서 선택에 직면했을 때 그는 회색을 선택했다.


그러나 외교정책에서 미봉책, 즉 절충은 보통 가능한 정책들 중에서 불리한 점들을 결합하게 된다고 아롱은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롱은 케네디 대통령이 베를린 위기에 대한 접근에서도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또다시 케네디 대통령은 정반대의 행동을 추천하는 상담역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서베를린과 서독에서 미국의 지위를 약화시킬 협상타결이고, 또 하나는 적어도 당장에는 전쟁의 위험을 증가시킬 비타협적인 자세였다. 아롱이 보기에 대통령은 이론상으로는 강경노선을 선택했지만 그러나 그의 스타일과 방식 그리고 언어에서 그는 신축성에 헌신했다. 그 결과 케네디가 처칠의 역할을 하려 했는지 아니면 체임벌린의 역할을 하려 했는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 국민은 물론이고 동맹국들 그리고 아마도 소련의 흐루쇼프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서방의 협상입장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롱도 그 의문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쿠바의 개입과 베를린 위기에 대한 케네디 대통령의 우유부단함은 모두 대통령의 경험과 개성에 깊이 뿌리박힌 결핍의 표방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케네디 대통령은 정치인의 과업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반면에 정치가의 과업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인의 방식으로 정치가의 과업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덕목은 그들이 정치가의 과업을 마주했을 때 쉽게 악덕이 될 수가 있다. 모든 대통령은 정치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무 대통령이나 정치가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정치가의 결정은 3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행동에 대한 헌신, 모든 다른 행동의 길을 배제하는 특수한 행동에 대한 헌신이고, 그리고 알지 못하고 또 알 수 없는 것의 앞에서 취하는 외로운 결정이다.

정치인은 말을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자기를 위해서 혹은 자기의 조치를 위해서 투표하게 하려고 모색하는 한 그의 말은 실제로 행동이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약속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약속은 심지어 지켜질 것으로 기대되지도 않을 수 있다. 그는 선거 때마다 자기의 강령으로 출마할 수 있고 그 사이에 아주 다른 근거에서 자기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그는 상이한 행동의 길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 있고 또 그것들 모두를 포용함으로써 양립할 수 없는 입장들 사이의 균열을 메울 수도 있다. 그는 오늘은 이런 방식으로, 그리고 내일은 저런 방식으로 투표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결심할 수 없다면 기권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사실과 조직 그리고 기획에 적합한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준비함으로써 미래의 불확실성을 최소로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정치가는, 특히 타국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결코 그런 일들을 할 수가 없다. 그의 수사학은 말로 표현된 행동, 즉 이미 행해진 행위의 설명이거나 아니면 다가올 행동의 맛보기다. 처칠이나 루스벨트의 녹음된 연설에서 오늘날 우리를 여전히 감동시키는 것은 그것의 문학적 성질 그 자체보다는 말과 행동 사이의 유기적 연계이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행동을 기억하고, 그래서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 정치가는 모든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특수한 행동에 헌신해야만 한다. 그는 루비콘강을 건너거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다 할 수는 없다. 그는 어떤 확실한 모험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든가,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 서서 다른 모험을 취할 것이다. 위험이 없는 중간 길은 없다. 또한 한 노선의 행동을 취하는 모험을 하기 전에 움츠러들어 한 걸음 후퇴하고 상이하고 보다 적은 모험을 약속하는 어떤 다른 모험을 시도할 수도 없다. 그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면 그것을 취소할 수 없다.

정치가는 루비콘강이 얼마나 깊고 격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그리고 그가 강을 건너 다른 쪽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를 알지 못한 채 건너야 한다. 그는 그것의 결과를 알지 못한 채 특수한 노선의 행동에 헌신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무지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짐작에 국가의 운명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침투할 수 없는 미래의 어둠을 마주하고 국가를 이끌면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추구하기보다 그는 피할 수 없는 무지에 자신을 조화시켜야 한다. 그는 비극에서 주연배우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역을 연기해야만 한다. 대통령은 자기 마음의 우유부단함을 극복해야 한다. 그 마음은 국내정치에서 늘 길들여진 예측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는 외교정책에서도 일종의 예측성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권고와 정보의 광적인 수색은 과거 군주들에게 점성술사들과 점쟁이들이 했던 것과 동일한 기능을 대통령에게 수행할 것이다. 즉 그것은 확실성이 없는 곳에서 확실성의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크빌(Tocqueville)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국내정치와 외교정책 사이의 관계가 걱정거리다. 그것은 건전한 외교정책의 합리적인 요청과 민주적으로 통제된 여론의 감정적 선호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에 의해서 제기된다. 대통령에겐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다. 만일 대통령이 자기가 건전하다고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비타협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는 우드로 윌슨처럼 국내에서 여론의 지지를 잃을 위험이 있다. 반면에 그가 건전한 외교정책이 요구하는 비용을 무시하고 그 여론을 추종한다면 그는 체임벌린처럼 국가이익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이런 두 개의 극단을 피할 수 있기 위해서 대통령은 국민의 교육자요 두 입장의 조화자라는 두 가지의 역사적 기능을 수행해야만 한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삶의 사실들과 국가를 위해 그들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를 말함으로써 건전한 외교정책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고 그리고 국내 여론을 달래면서 건전한 외교정책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는 타협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정치인을 넘어서 정치가가 되려면 자신의 역사철학적 안목과 진정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정책의 창안자요 동시에 여론을 일깨우는 일종의 '국민교사'로서 자기의 역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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