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진실 어긋난 화해]③[단독] “74년 만에 피해자 인정…국가배상 못 받는다”

'좌익협력' 몰려 1949년 총살…국가배상 '패소'
헌재·진화위 결정에도, 法 “재심청구 안 돼”
법조계 “중대 인권침해에 ‘기판력’ 적용 안 해야"
‘법적 안정성’ 침해 우려에 ‘특별법 제정’ 의견도

임상혁 기자|2024/06/06 17:00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련없음. /게티이미지
A씨는 1949년 경찰에 의해 총살됐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군과 경찰이 좌익활동이나 빨치산에 협조한 이들을 색출해 처형하는 일이 있었는데, 평소 한문을 익히고 마을 구장까지 맡을 정도로 주민들에게 신망을 받던 A씨가 좌익협력세력으로 의심받았다. 결국 경찰에 끌려간 A씨는 그 해 경북 영덕군 모 계곡에서 목숨을 잃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지난해 8월 '경북 영덕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려 A씨를 비롯한 20명을 희생자로 인정했다. 진화위는 "희생자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향해 유족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 등을 실시하라고 권고했다.

진화위 결정 이후 A씨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2012년에도 국가배상소송을 냈다가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패소했는데, 진화위 결정 이후 재심을 청구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월 대구고법 민사2부는 "진실규명 결정이 있었다는 점만으로 재심사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6일 아시아투데이 취재를 종합하면 헌법재판소가 2018년 '국가가 중대하게 인권을 침해한 사건'에 민법상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음에도, A씨 사례와 같이 헌재 결정 전 제기된 사건들은 구제받지 못하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국가폭력 사건에 대해선 재심 인정 사유를 지금보다 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법상 소멸시효는 어떤 권리가 있는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박탈하는 제도를 말한다. 기존 국가배상법은 민법 766조를 적용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불법행위가 있던 시점으로부터 5년 이내 국가 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A씨 유족이 처음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을 당시에도 재판부는 "경찰의 불법행위로 인해 A씨와 가족들이 막대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으로 판단돼, 국가가 A씨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A씨가 살해된 1949년으로부터 5년이 경과한 1954년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시했다.

A씨 사례처럼 이미 소송을 제기해 패소가 확정됐다는 이유로 배상받지 못하는 일은 또 있었다. 대법원은 지난 2022년 8월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자 민사적 불법행위에 해당해, 국가가 당시 체포·처벌·구금된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 책임을 진다고 판단했다. 다만 절반이 넘는 피해자가 이미 소송을 제기했다 패소가 확정됐다는 이유로 결국 배상에서 제외됐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과거사정리법상 집단희생사건,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 등에 대해선 소멸시효처럼 '기판력(확정판결에 대해 다시 다툴 수 없는 효력)'을 적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형사사건은 명백한 신규 증거가 있으면 재심을 열 수 있지만, 민사사건 재심은 훨씬 더 엄격하게 본다. 결국 헌재나 대법원 결정 이전 소송을 제기한 사람만 억울하게 되는 것"이라며 "중대 과거사 사건에 기판력을 적용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일률적인 법 조항을 만들어 적용하는 것보다, 사안마다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중대한 사건이나 인권침해 사건임을 이유로 기판력이 쉽사리 배제되도록 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크게 저해할 우려가 있고, 그 기준을 법 또는 판례 문언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불분명한 영역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대법원의 긴급조치 9호 판결 때처럼, 동일한 사건의 피해자임에도 구제를 못 받는 경우가 바로 잡힐 수 있도록 '특별법' 입법을 검토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고 제언했다.

2기 진화위 비상임위원을 맡고 있는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왜 다른 국가 권력 오남용 사건은 대상으로 하지 않느냐'는 등 '법 앞의 평등'과 관련된 논란이 생길 수 있다"며 "특정 사안에 대한 특별법을 넘어, 국가폭력이 확인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