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두 前 전경련 부회장에게 듣는다] “대우차, 김우중에게 맡기는 게 최선의 대안이었다”
IMF 외환위기 27주년 특별대담 <下>
경영인 배제 워크아웃, 초보자에게 운전대 맡긴 격
대우차 헐값 매각, 국부 일시에 사라져 안타까운 일
투자 가로막는 규제 당장 풀고 규제혁신 힘써야
기업투자 부족하면 국가가 교육·R&D 투자 필요
|
[대담=김이석 논설심의실장·황남준 대기자]
-정부는 6대그룹 이하 계열 기업의 재무구조개선을 기대하고 1998년 6월 워크아웃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동아건설이 1998년 9월 워크아웃 1호기업으로 선정돼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1999년 8월 5대그룹 가운데는 유일하게 대우그룹 12개 계열사가 포함됐습니다.
동아건설과 대우자동차의 워크아웃은 기존 경영진을 철저히 배제하고 채권단 중심의 재무구조 개선 중심으로 진행이 됐지만 결국 법정관리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건설업과 자동차업의 대표격인 두 기업은 워크아웃 이후 기업 가치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부실이 더 커집니다. 채권단의 자금 지원 부족, 경영관리 소홀했고, 정부의 지나친 경영 개입 등이 법정관리의 원인으로 지적되곤 했습니다. 정부의 워크아웃 정책 실패,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은행은 돈 장사하는 사람들이지 기업 경영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이 누구를 데려다가 대리 경영을 시키잖아요. 그동안 회사를 맡아 경영해 오던 사람들을 배제시키고 전혀 다른 사람을 갖다 놨는데 그 사람이 회사경영을 파악하고 아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아무리 경영의 신이라도 해도 금방 그 기업을 살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거든요. 그런 사람을 앉혀가지고 경영해 보라는데 그게 살아나겠습니까. 그 회사 경영인을 배제했다는 것 자체가 전문 운전기사를 버리고 초보 운전기사한테 경영을 맡긴 것과 같아요. 기존 경영진이나 대주주를 배제한 워크아웃 정책은 실패 위험이 높았어요.
기업은 마케팅, 생산, 종업원 관리도 해야 됩니다. 종합예술이 바로 경영입니다. 경험이나 노하우 없이 자금 관리만 한다고 그 기업이 살아 나가는 건 아니거든요.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은 경영을 잘하던 사람에게 힘을 줘서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금융기관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실제 기업 경영에 간섭을 하는 것도 큰 문제였어요.예컨대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게 한 것도 그런 영향을 받았어요. 워크아웃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 정부가 자연스럽게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통로가 돼버린 겁니다. 워크아웃은 당시 기업구조조정에서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이었어요.
-대우그룹이 자기 잘못보다는 정부의 정책적인 압박, 혹은 규제 때문에 해체됐다는 것이 김우중 회장의 주장입니다. 대우그룹은 밀수, 탈세, 경영 실패 등으로 문제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1999년 10월 영국 출국에 앞서 전경련 회장단과의 자리에서 정부의 잇따른 자금 압박 때문에 해체가 됐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일련의 정책적인 규제 수단들에 의해 대우그룹이 타살 당한 것'이라는 주장, 어떻게 보십니까.
대우가 무너지는 거는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 두 개가 합쳐서겠지만, 외부적인 요인이 더 컸다고 봅니다. 정부의 여러 조치들에 의해서 대우가 결론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경영을 하던 대우에게 수출금융이 중요한데 새 정부 출범 때부터 그것을 정부가 끊었습니다. 기업어음과 회사채로 자금조달을 바꾸니 그것도 끊어버립니다. 그러니 눈치 빠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에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를 내지 않습니까.
1998년 말 유동성 위기에 몰린 대우는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바꾸는 빅딜로 갔는데 그게 안 되니까 결국 워크아웃으로 몰렸습니다. 이를 '김우중과의 대화'라는 책을 쓴 신장섭 교수는 '일종의 의도된 조치들'이었다고 얘기합니다. 신 교수 주장이 신뢰할 만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3년간 추진한 금융·기업 구조조정 물거품 돼
-정부는 2000년 12월에는 한빛은행 등 6개 은행에 대해 전액 감자한 후에 공적자금 7조원을 투입해서 현대그룹 사태로 악화된 은행의 경영난을 돕습니다. 이들 은행의 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이 다시 8% 이하로 떨어지게 됐습니다.
현대그룹은 2000년 3월 '왕자의 난' 이후 그룹 경영이 마비되고 현대투신, 현대건설, 현대전자 등 주력계열사가 유동성 위기에 빠져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게 됩니다. 현대그룹의 부채 비율도 외환위기 이전의 200%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3년 가까이 추진해온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정책이 6개은행 감자와 현대 사태로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 됩니다.
국민의 정부가 3년 동안 100조원이나 공적자금을 투입해 추진한 금융·기업 구조조정이 이제 완전히 실패한 상황이 돼버립니다. 기업계는 당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하반기에 IMF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하고 이제 관심을 대북 사업으로 돌렸잖아요. 그러면서 정부의 정책 초점이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멀어졌어요. 그 뒤 은행 구조조정도 흐지부지되지요.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정책이 대북 사업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욱 전경련 기업경영팀장은 "2000년쯤 5대 그룹은 재계 자율 구조조정을 하도록 방침을 정하고 사업교환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일반기업들은 기업 구조조정 특별법을 통과시켜 스스로 계속 구조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습니다. 그런 걸 원천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 바람에, 더 이상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하려는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과 이산가족상봉 분위기 때문에 국민들은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경제위기가 재발되는 상황인데도 그걸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우차 쓰레기로 변해 헐값 매각
-채권단이 2001년 9월 GM과 대우차를 6억 달러에 매각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2002년 4월 정식 계약을 체결합니다. GM과 채권단은 'GM대우'란 신설법인을 만들어서 대우자동차를 인수합니다.
GM이 대우차를 인수하는 데 들어간 돈은 4억 달러, 당시 한화로 5200억원입니다. 김우중 회장이 1998년에 GM에 부른 150억 달러의 2.6% 가격에 팔린 겁니다. 당시 GM과 정부 채권단은 이런 계약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요.
대우차의 가치가 1999년 워크아웃, 2000년 법정관리로 갔다가 GM에 매각됐는데, GM에 매각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요.
정부가 대우자동차를 GM에 매각 협상할 때 자금을 지원했으면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도 필요 없이 정상화됐을 겁니다. 왜 대우 경영진을 내쫓아 버리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그런 거래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거래가 거의 공짜 아닙니까. 완전히 장사꾼한테 당한 거죠.
중요한 문제를 채권단에다 맡겨서 처리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입니다. '기업 너희들끼리 사고팔라'고 해야지 정부가 외국기업과 직접 거래를 해서는 안 되지요. 어떻게 보면 매국적인 것이죠.
당시 현대자동차는 이미 기아차를 인수했고 삼성은 자동차를 내놓은 판인데 인수를 할 수 없었어요. 국내에는 인수 후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틈을 GM이 알고 들어와서 정부와 딜을 해서 싸게 가져간 것이지요.
(이병욱 팀장은 "김우중 회장은 1998년 GM과 자본협력을 해서 70억 달러를 들여올 수 있었다고 했어요. 기업들에게 자율적으로 구조조정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거나 휴스 GM부사장이 이헌재 위원장에게 50억 달러에 수의 계약으로 대우차 인수를 제안했을 때 승인했으면 공적자금을 크게 아낄수 있었어요. 일부 관료의 잘못된 판단이 일을 그르쳤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장 좋은 대안은 김우중 회장으로 하여금 스스로 대우차를 경영하게 하는 거였어요. 정부가 1999년 7월 구제금융을 제대로 해줘서 대우자동차를 살리는 쪽으로 갔으면 돈이 적게 들고 경제를 살리는 효과도 컸을 겁니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민경제적 입장에서 우리가 배운 교훈이 있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우리 기업이 어려워진 부분의 80% 정도는 행정 규제라고 봅니다. IMF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나는 정치인들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1995년 베이징 특파원들과 간담회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회장이 그때 그 말을 해서 얼마나 많은 곤욕 치렀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건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시장경제체제가 아니라 발전 못한 겁니다. 중국이 오늘날 저렇게 발전한 건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던 나라가 이렇게 부쩍 큰 것은 관료나 정치인의 힘에 의해서 큰 것이 아니고 주로 돈을 벌어들인 기업인들의 의해서 큰 것입니다.
우선 기업을 살려놓아야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살려놓기 위해서는 행정 규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체감할 만큼 경제가 좋아지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작지만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규제 혁신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경제는 설비, SOC, 교육, R&D 등 투자에 의해서만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은 가장 효과적인 복지 정책이기도 합니다. 첨단 기술 산업에서 미국, 중국, 경쟁하는 우리나라는 교육과 R&D 투자에 목을 매야 합니다. 기업 투자만으로 부족하면 국가가 나서서 필요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투자 계획이 있는데 규제가 막고 있다면 당장 풀어줘야 하지요.
◇위기로 시작해 위기로 끝난 'IMF플러스' 체제
국민의정부는 국제금융기구인 IMF체제 아래서 3년 8개월 동안(1997년 12월4일~2001년 8월 23일), 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고 깊은 변화를 주도했다. 이 기간 중 한국에 적용된 IMF프로그램을 이른바 'IMF플러스' 체제라고 부른다. 이는 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다른 나라들이 경험하지 못한 혹독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다.
IMF는 특히 금융시장의 완전 개방, 가혹한 금융·기업구조조정 정책 실행을 요구했다. 국가부도를 막으려면 정부는 IMF의 이런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에서는 경제주권을 빼앗긴 '제2의 국치'라고도 말한다.
'IMF플러스' 체제 아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화해에 기초한 대규모 대북투자사업을 실행한 '햇볕정책'을 동시에 추진한다. 이 두 가지 요인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틀과 동력으로 작용한다. IMF외환위기는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사회구조를 뿌리째 뒤흔든 큰 변곡점이었다.
IMF 체제 첫해인 1998년 GDP성장률은 마이너스 6.7%에 달했고 1999년 10%대, 2000년 8%에 이어 마지막 해인 2001년에는 3%대로 주저 앉았다. IMF체제는 위기로 시작해 위기로 끝난 셈이다. 30대 그룹 중 절반 이상이 무너졌다. 5대그룹중 재계 2위를 차지하던 대우그룹이 정부에 의해 해체당하고 재계 1위인 현대그룹이 정부 특혜에 따른 과도한 몸집불리기에 따른 경영난과 무리한 대북투자로 해체를 자초했다.
그 여파로 한국경제 제조업의 기반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실업자가 한때 150만명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경제의 안건(安健)한 버팀목이었던 중산층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정부의 부채비율 200% 정책과 빅딜, 워크아웃 등 불합리한 기업구조조정정책, 햇볕정책 등의 후유증으로 알짜배기 기업들이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를 받아 무더기로 헐값에 해외에 매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IMF프로그램은 국내 경제시스템이 선진화되는 계기가 된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금융산업이 대형화되고 대출이 투명해지는 등 경영시스템이 합리화됐다. 기업경영시스템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주요 대기업의 부채비율이 200% 안팎으로 낮아졌으며 대기업 간 상호지급보증도 크게 축소됐으며 기업회계도 투명 선진화되고 재무제표의 신뢰성도 높아졌다.
'국민의정부'는 2001년 8월 23일 IMF 구제금융 체제를 2년 9개월 앞당겨 공식적으로 졸업했다. 1997년 12월 IMF에서 빌린 195억 달러를 모두 상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IMF로부터 24조원가량의 달러 급전을 빌려 쓴 대가로 당시 2년치 국가예산 규모인 168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