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정현의 조각 시(彫刻 詩·Sculptural Poetry)
논설심의실|2024/12/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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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바젤 최고경영자 노아 호로위츠(Noah Horowitz)는 "아트 바젤의 사명은 선도적인 예술가와 갤러리를 예술 애호가들과 연결해 예술계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2024 아트 바젤은 6개의 주제별 섹터, 즉 메리디안(Meridians), 노바(Nova), 서베이(Survey), 캐비닛(Kabinett), 포지션(Positions), 매거진(Magazines) 등을 구분하여 기획적 관점을 선명히 하고 글로벌 플랫폼의 역할을 기대했다. 단기간 2000~3000점 이상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아트페어의 생산성은, 누가 뭐래도 방문자 각자의 취향과 공명하는 예술 작품에 빠른 접속, 해석, 컬렉션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2024 아트 바젤은 통념상 아트페어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최 측의 큐레이팅이 존재했고 유효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 PKM갤러리는 서베이 섹터에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정현(b.1956)의 솔로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아트 바젤 측에 따르면, 서베이 섹터는 2000년도 이전에 제작한 한 작가의 작품들로만 구성되었는데, 중요하지만 지속되지 않는 예술적 관행을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자신의 관심사나 취향에 따라 이 거대한 작품 더미 속에서 시장 트렌드와 아트신 내 작가들의 위치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분석을 원하는 방문자들에겐 자신의 컬렉션 맥락 구성에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10월호 '공간'에 실린 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아트페어에는 큐레이션이 없다고들 한다. 작품 간의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 미술관이나 비엔날레 등의 대규모 전시들과 달리, 함께 보일 의도가 전혀 없는 수많은 작품이 한 공간에 모여 전시되는 아트페어에서는 큐레이션을 수행하는 이는 방문자라는 것이다.
어쩌면, 올해 아트 바젤이 6개의 섹터를 구분하고, 7개의 프로젝트를 선정하여 에디터의 리뷰를 게시하는 일련의 일들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행위, 즉 능동적으로 사적 큐레이팅을 하고자 한 방문자들에게 주최 측의 신뢰와 확신을 제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아트 바젤 '에디터 픽' 리뷰는 정현의 작품을 가리켜 '조각 시(Sculptural Poetry)'라 표현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B.C. 65-8)는 자신이 쓴 '시학'에서 '시는 회화처럼(Ut Pictura Poesis)'이라고 했다. 시와 회화의 내적 동일화는 상용화되어, '회화시' 혹은 '그림시'라는 문학비평용어도 있다. 그런데, '조각시'라니!
정현의 브론즈 작품 <Untitled>(1995)은 그 형태와 작품의 제작 과정 등을 고려하면 작가의 '조각시'가 노래하는 깊은 실존을 마주하게 된다. 1990년대 정현의 작업 대부분은 전통적인 조각이 그러하듯 흙으로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에 쥐는 조각도구가 아닌 두 팔과 온몸으로 들고 쥐어야 하는 삽이나 각목으로 흙덩어리를 내려쳐서 형상을 만들었다. 인체의 세부는 일그러지고 생략되었다.
대신에 작가의 과감한 제스처, 감정이 흙에 가한 압력의 강도들은 흙의 질적 상태를 새로운 차원으로 전회시키고 재료로서의 흙과 자신의 실존 에너지를 교착, 교환, 공명하게 한 것 같다. 그럼으로써 정현은,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 살아있음 그 자체, 날것, 예측 불허하는 이미지, 느닷없음, 비탄으로부터의 해방,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헤맴들의 깊이"('올해의 작가 2006 정현', 141쪽)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조각이되 시 이상의 시(詩)인 그의 두상, 흉상, 인체 등은 나를, 그리고 우리의 실존을 진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정현은 2024 아트 바젤을 통해 10점의 작품을 판매했다. 컬렉터 가운데는 아트 바젤 집행위원도 포함되었다 하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은 정현의 작품에서 '조각시'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구매자 가운데엔 그의 '조각시'에 공감한 애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큐레이터·상명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