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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100세 시대] 김봉규 교수의 ‘진짜힐링 가짜힐링’②

[희망 100세 시대] 김봉규 교수의 ‘진짜힐링 가짜힐링’②

* 생각이 있는 긍정

김봉규 미래행복인재연구원 대표 기자|2013/01/20 10:44
<생각이 있는 긍정>

낙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가시가 아닌 꽃을 보고 
비관주의자는 꽃은 잊고 가시만 본다.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가시가 아닌 장미를 보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긍정적 마인드를 소유한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 “승자가 즐겨 하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이고 패자가 즐겨 쓰는 말은 ‘해봐야 별 수 없다’”라고 탈무드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힐링의 두 번째 방향인 긍정의 심리학은 좌절하고 절망한 현대인에게 용기를 내라고 주문한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스스로를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격려도 잊지 않는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그러니 일상에서 늘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미래의 성공한 모습을 상상하라! 그런데 긍정의 심리학은 과연 말 그대로 긍정적일까?


“만약 그 때 장미 옆의 가시를 보았다면, 달콤한 돈의 향기에 움켜쥔 장미로, 나만 가시에 찔려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행복도 사라질 수 있음을 알았더라면, 덜컥 대출받아 집을 사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 지금 삶의 한 가운데 박힌 그 큰 가시를 그 때 보았다면 장미가 언제나 피어있지 않는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긍정의 심리학이 짝퉁힐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긍정하라!”처럼 추상적인 말은 없다.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떤 근거로?’의 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긍정일 뿐이다. 맹목적 긍정의 특징은 무엇보다 본질에 대한 침묵이다. 무엇이 본질인가? 긍정적 사고 이전에 무엇을 긍정하고, 긍정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구분해내야 한다는 지혜이다.


허구와 진실을 분리하지 않는 삶은 마치 자신이 구입한 고가의 상품이 명품인지 짝퉁인지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같다. 짝퉁상품의 경우는 그래도 낫다. 나중에 안다 하더라도 조금 손해 봤다 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당신은 시간의 시작과 끝에서 단 한번 태어나 단 한번 사는 절대적 일회성의 존재이다. 소중한 만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무조건 “다 잘 될 거야!”라는 허구적 유혹은 벗어나야 한다. 쥐구멍에도 볕이 들 날이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기본적으로 쥐구멍엔 볕들 날이 없다. 고생 끝에 낙을 꿈꾸다 ‘멘붕’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들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컵 안에 물이 반쯤 차있다. 당신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당연히 후자이지!”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안다. 당연한 것은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반 밖에 안 남았다는 사고도 진실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 이제 인생의 반이 벌써 지나갔다고, 나의 삶에 주어진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어야, 의미와 가치로 남은 시간을 채울 수 있다. “아직 반이나 남아 있으니, 여유롭게 가자!”라고 멍하니 살아간 결과를 우리는 매일 신문에서 보고 있다.

정리해보면, 첫째 긍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맹목적 긍정이 아니라 합리적 긍정이 답이다. 기회는 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꿈을 정확히 알고 준비한 사람에게 온다. 행복한 노년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알고, 그 행복을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행복을 모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원하고 또 준비할 수 있겠는가? 


둘째 부정도 필요하다. 다만 허무적 부정이 아니라 현명한 부정이 답이다. 현명한 부정은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 나아가 구체적이며 의미지향적인 태도가운데, 삶을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사유방식이다. 그러므로 맹목적 긍정과 허무적 부정은 어리석음의 사촌이고, 합리적 긍정과 생산적 부정은 지혜의 어머니이다.

쥐구멍에서 빛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빛이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쥐구멍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받침대를 세우면서 정확히 빛을 향해 문을 열어 젖혀야 한다. 그래야 그림자를 뒤로 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지금의 첫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떠난다. 시간은 만나는 순간 사라지고, 생각하려 할수록 잊혀져가는 법이다. 두 번 사는 ‘나’도 없고 두 번 죽는 ‘나’도 없다. 인생엔 연습도 복습도, 오류를 수정할 지우개도 없다. 지금 단 한 번의 시간들이 당신 앞에 놓여있다. 얼마나 남아있는가, 어떤 의미와 가치로 그것들을 채우려는가,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목적이 매달 약간의 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삶을 버텨내는 것이어야 할까?

힐링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누군가 선물로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깨닫고, 노력하여 결국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긍정은 생각하는 긍정이다. 생각이 없는 힐링은 이미 죽은 힐링이다.